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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海道の写真-あの冬あの夏

한일터널과 동북아 평화

한일터널과 동북아 평화

발표자: 우 찬 중(湖原大學校 호텔관광학부 교수)

1. 머리말

흔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말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그만큼 가까우면서도 역사적으로는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실제로 청명한 날이면 부산이나 거제도에서 일본 땅 쓰시마(對馬島) 섬이 보입니다. 저는 지난 해 11월 거제도에서 쓰시마 섬이 보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2004년에는 쓰시마 섬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하여 국제로밍을 하지 않고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를 했으며 날씨가 맑아서 육안으로 한국의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을 보았습니다. 크게 감동했음은 물론입니다. 2003년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소야미사키(宗谷岬)에서 러시아 사할린 섬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 그 이상이었습니다. 또한 2008년에는 홋카이도 시레토코(知床) 반도의 라우스(羅臼)와 노쓰케(野付) 반도에서 지금은 러시아 땅인 하보마이(歯舞) 군도와 구나시리(国後) 섬을 육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육안으로 외국 땅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안으로 상대국의 땅을 볼 수 있는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정말 가깝습니다. 표준시를 같이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왜 먼 나라가 됐을까요? 가깝다는 것은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껄끄럽기도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반도는 크게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른바 지역감정에 얽혀 나라가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어 국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지역감정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줄여나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한 국가에서 이럴진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상대국에 대한 나쁜 감정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상대국에 대한 나쁜 감정은 점점 줄여 나가되 좋은 감정은 점점 키워나가야 공동 번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류와 소통입니다. 조선시대에 한일 간에 가교 역할을 하며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평화 번영을 추구했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제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상대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그러한 노력을 덜어 줍니다. 교통수단의 발달, 특히 항공 교통의 발전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장거리 이동에 항공기만한 교통수단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다량의 탄소배출로 인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으로 알려진 철도, 특히 고속철도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세이칸(靑函) 터널이며 영국과 프랑스 간의 유로터널입니다. 현재 동북아의 핵심 국가는 한국과 일본, 중국 즉 동북아 세 나라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북한에 가로막혀 섬나라나 마찬가지 상태이며 한국과 일본은 바다에 가로막혀 역시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나라는 섬나라처럼 각각 분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교통이 불편했던 오랜 옛날에도 세 나라는 평화롭게 교류하면서 문화를 공유했습니다. 특히 한국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지리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던 일본은 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일․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린 것은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란(壬辰亂)과 1910년의 한일합방,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이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1598년 임진란 후 에도(江戶)시대가 시작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607년부터 12차례에 걸쳐 조선과 일본이 그 멀고 먼 길을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 교류를 했다는 점입니다. 1607년이라면 전쟁의 참화가 미처 잊혀지기도 전이었습니다. 두 나라 사람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교류와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통망의 정비가 필요합니다. 한․일․중 삼국이 중심이 되는 동북아의 공동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한일터널이 완성되어야 합니다. 저는 역사적으로 한일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고 남북평화통일 및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왜 한일터널 건설이 필요한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고대의 한일 교류

한국과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먼 옛날은 논외로 하더라도 양국 사이에는 끊임없이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바다로 분리되어 있는 한일 양국의 교류 수단은 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남해안에서 쓰시마 섬, 이키 섬, 큐슈에 이르는 해상로가 주로 이용되었는데 이 루트는 가장 가깝고 안전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쓰시마까지의 거리는 불과 53km입니다. 쓰시마에서 이키 섬까지 53km, 이키 섬에서 큐슈까지 20km에 불과하므로 해상교통로로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던 것입니다. 이 밖에도 영산강 하구나 섬진강 하구 등에서 출발하여 쓰시마를 거쳐 큐슈로 가는 루트, 동해안에서 출발하여 혼슈의 시마네 현이나 후쿠이 현으로 가는 루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루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진출하여 토착민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고 융합되기도 하면서 쌀농사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이를 야요이문화라 하는데 이 무렵 일본에 고대 국가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화는 점차 동북진하여 오사카와 나라 등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때 한반도에서도 여러 작은 나라들이 통합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국가다운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고대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유력 씨족으로 자리를 잡아 지배층이 되었음은 9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나오는 성씨 중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반도 도래계가 30%를 차지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일본에 건너간 사람 중에 대표적인 씨족으로는 가와치노후미(西門) 씨, 하타(秦) 씨, 야마토노아야(東漢) 씨가 있었으며 이들은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식자층이어서 주로 기록과 재정, 외교 분야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후 5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을 습득한 백제계, 가야계, 고구려계 등의 도래인들이 일본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제도 구축과 최초의 귀족문화인 아스카(飛鳥)문화 형성에 일조했습니다. 이들은 동시에 일본 고대 국가의 사상적 기초였던 불교를 도입하여 발전시켰습니다. 7세기 후반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자 상류 귀족층과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 후손들도 나라 시대를 거쳐 헤이안(平安)시대에도 일본 고대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3.임진란 이후의 한일 교류-조선통신사

임진란이 끝나고 1607년, 조선과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가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이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260여 년간 양국은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합니다. 양국 간의 외교적인 실무는 동래 부사와 쓰시마 번주가 맡았습니다. 조선은 한 해에도 여러 차례 북경에 사절을 보냈기 때문에 거기서 얻은 중국의 정세 등에 관한 정보를 쓰시마 번주에게 전해주었고, 쓰시마 당국은 파발선을 띄워 그 정보를 막부에 보고했습니다. 반대로 일본에서의 중요한 사건이나 쇼군 가의 경조사 등에 관한 정보는 3개월 후에 조선 조정에 전해졌습니다.
한편 1609년의 무역협정으로 부산포에는 '두무포 왜관'이 설치되어 500~600여 명의 일본인이 2, 3년 교대로 상주했습니다. 이는 쓰시마 번에 거주한 남자의 3~4%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부산포에는 연간 50척을 넘는 일본 무역선이 왕래하면서 양국 간에 무역업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에도시대 조선과 일본 관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통신사(通信使)입니다. 모두 12회 있었으며 처음 3회는 회답사(回答使) 혹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불렀습니다. 쇄환이란 임진란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데리고 귀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후 처리가 끝난 후 나머지 9회는 쇼군의 교체 때마다 파견되어 통신사라 불렀습니다. 통신이란 친분을 서로 나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통신사의 규모는 300~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구성원의 면모를 보면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使官) 의 3사(使)와 유학자․의사․화가를 포함하여 평균446명이었습니다. 조선의 서울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6척의 배에 나누어 탄 일행은 쓰시마 번주를 비롯한 8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키 섬과 후쿠오카,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 내해를 통과하여 오사카에 도착, 육로로 교토를 거쳐 에도로 향했습니다.
에도막부가 통신사를 맞이하는 데 쓴 돈은 100만냥(600억엔)에 달했습니다. 막부가 이렇게 많은 돈을 쓴 것은 쇼군의 권위를 국민들에게 과시하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통신사가 머무는 도로변 숙사에는 각 번의 유학자와 의사, 화가가 몰려들어 술을 마시며 상호 교류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간행된 문답집이 백수십 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통신사는 문화교류 사절단이기도 했습니다. 260여년 간에 걸친 선린우호관계는 양국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담배와 고구마 고추 등이 조선에 전해졌는데 특히 고추는 조선의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통신사 교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로서 20대의 젊은 나이에 쓰시마(對馬島) 번의 외교관에 임용되어 거의 30년 동안 조선과의 외교업무를 담당했던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1668~1755)입니다. 그는 <楢窓茶話><交隣提醒><交隣須知> 등 다수의 책을 남기고 에도기의 朝日관계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交隣須知>는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로서 메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일 양국의 우호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일본측 인물로 그를 지명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쓰시마 여행 때 한일 양국 발전을 위해 헌신한 그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한일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交隣提醒>에서 조선과의 외교에 특히 '성신(誠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외교의 기본은 誠心과 信意라는 뜻입니다. 임진란을 명분 없는 전쟁으로 본 것이라든지 조선의 풍습과 문화를 잘 파악하고 존중해야 양국의 평화관계가 지속된다고 본 그의 식견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아메노모리호슈와 같은 인물을 조선에서 찾는다면 신숙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四大交隣'을 나의 임무로 삼는다'고 씌어 있습니다. 四大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交隣은 일본과의 외교를 뜻합니다. 또한 성종에게, '바라옵건대 일본과의 화합을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海東諸國記>에서, '일본과의 외교는 그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여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조선과 일본, 중국 삼국의 평화를 희구한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숭고한 평화 사랑 정신입니다. 위에 언급한 두 사람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국제교류를 하는데 절실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4.한일터널과 남북평화통일 및 동북아 평화

현재 한국에서 거론되고 있는 해저터널은 목포-제주 간, 한일터널, 한중터널입니다. 목포-제주 간 터널의 타당성 조사 결과는 올해 8월경 발표될 예정입니다. 조선일보(2011.1.5) 기사에 의하면 국토해양부는 최근 교통연구원에서 한·중,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교통연구원은 지난해 중국 웨이하이(威海)와 인천 경기 화성 평택·당진 등 4곳 중 한 곳을 연결하는 한중 해저터널과 부산~쓰시마~후쿠오카(222.6㎞)를 연결하는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건설 비용과 10년 이상의 긴 공사기간 탓에 비용편익비가 낮게 나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중 해저터널은 인천~웨이하이의 경우 123조원(경기개발연구원 추산), 한일 해저터널은 92조원(부산발전연구원)이 드는 초대형 사업입니다. 국토부 관계자가 “경제적 타당성 수치가 낮게 나온 것은 예상한 일”이라며, “그러나 공사 방법 등에 따라 비용이 달라질 수 있고 정치적·외교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상황은 가변적”이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일터널과 한중터널 건설 계획은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남 목포와 제주도를 잇는 해저 터널의 경우 교통연구원 등이 지난해 5월 타당성 조사를 시작해 오는 8월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제주~목포 해저 터널은 보길도에서 제주까지 73km에 이르는 바다를 잇겠다는 구상입니다. 목포-제주 간 터널 계획은 한국내의 문제이지만 시야를 넓혀 보면 한일터널과 관련이 깊습니다. 만약 한국이 한일터널을 구상한다면 먼저 목포-제주 간 터널을 완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터널 건설 기술을 익힌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난 연후에는 한일터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한중터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건설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북한을 고립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중간에 가장 바람직한 교통망은 북한을 경유한 고속철도망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한중터널은 의미가 없습니다. 북한을 배제한 남북한 평화, 나아가 동북아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한일터널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상호 이해와 화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교착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남북 간의 해빙무드 흐름은 계속 이어져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랜 옛날부터 육로와 해로를 통해 이루어진 한․일․중 삼국의 교류가 가까운 미래에 한일터널 및 북한을 경유하는 고속철도망을 통해 전개된다면 동북아의 평화발전은 가속화될 것입니다.
원래 한일터널은 1981년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서울에서 개최된 한 포럼에서 국제평화고속도로 건설 방안을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경상남도는 남해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거제도와 일본 간 터널 건설에 관한 타당성 검토 작업에 들어갔고 국가적 과제로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83년 홋카이도대의 사사야스오(佐佐保雄) 교수가 '일한터널연구회'를 조직, '터널건설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986년부터는 '일한터널연구회'가 터널의 시발점으로 제안한 큐슈 사가(佐賀) 현 북서부의 가라쓰(唐津)에 탐사용 터널 건설공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400m쯤 파 놓은 상태입니다. 저도 몇 년 전 큐슈에서 진행되었던 평화대사 연수 참가 당시 현지를 방문하고부터 한일터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된 한일터널 상황을 보면 일본측이 적극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2008년 2월에는 자민당의 에토 세이시로(衛藤征士郞) 전 방위청 장관과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간사장 등 중진 여야 의원들이 국회에서 초당파 의원연맹 발기인 모임을 갖고 3월에 정식으로 출범시켰습니다. 에토 전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일터널은 꿈이 있는 프로젝트다. 평화 창조의 상징으로서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터널이 완성되면 일본 홋카이도에서 영국의 런던까지 철도로 연결됩니다. 최근에 와서 활발하게 거론되는 베링해협 프로젝트 즉 러시아와 알래스카를 연결하려는 해저터널이 계획대로 이루어질 경우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대륙이 철도교통망으로 연결되어 하나가 될 것입니다. 문 총재가 제안한 베링해저터널 프로젝트는 21세기 최대의 희망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업이든지 시작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되면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한일터널도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희망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결론

지금까지 한일 간의 교류사 및 한일터널을 통한 남북 및 동북아 평화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저는 한일터널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일교류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아 일본의 단가(短歌)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고 일본여행을 자주 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쓰시마, 이키 지방 자전거 여행, 자전거를 이용한 큐슈 일주, 역시 자전거를 이용한 일본 최남단 사다미사키(佐多岬)-일본 최북단 홋카이도 소야미사키(宗谷岬) 종단 여행(약 2개월), 두 차례에 걸친 일본열도 일주 자동차 여행(각각 약 2개월), 그 밖에 신칸센과 버스, 페리 등을 이용한 일본 일주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 저는 일본인들과 많은 교류를 했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일본인과 일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고 그들 또한 저를 통해 조금이나마 한국인과 한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을 것입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 부산과 하카타, 부산과 오사카, 서울과 도쿄를 선박과 항공기로 오가면서 한일 간에 터널이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일본을 오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인겸이 쓴 <일동장유가>에 관한 논문을 쓴 적도 있습니다. 통일교신자로서 한일 간의 평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제 친구에게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일 터널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런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개인과 개인 간에도 그렇듯이 국가와 국가 간에도 평화 공존을 위해서는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교류와 소통을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합니다. 과거 한․일․중 역사를 보면 애증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늘 좋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하고 긴 흐름에서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일․중 동북아를 하나로 묶고 더 나아가 세계를 묶는 첫걸음은 한일터널입니다.
한일터널 건설은 조선통신사가 그랬듯이 한일 교류 증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한․일․중 삼국의 소통과 상호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또한 북한을 개방시키고 발전시켜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 실현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한일터널은 선각자 문선명 총재가 주창하는 국제평화고속도로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한일터널, 베링터널 등 국가 간 거대 프로젝트는 어느 한 국가의 노력과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대로 “인류가 한가족이 되어 서로 마음의 담을 헐고 국가 간의 국경까지도 제거하자는 공생.공영.공의 사회의 실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인 것입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완성은 결국 진정한 동북아 평화 발전은 물론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이루는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 by 40si | 2011-01-2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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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40si | 2010-10-03 11:41 | 北海道写真集の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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